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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성(大邱城)의 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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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성(大邱城)의 가치

  불과 103년 전만 해도 대구는 성곽도시였다. 국내 최대 평지성곽이었던 ‘대구성’에는 ‘대구성’ 이후, 주목할 만한 성곽건설 없이 60년 뒤에 지어진 수원 화성의 모델이 되었다는 개연성이 생긴다. 화성축조의 주역이었던 정약용에게 건네진 중국의 병서 ‘무비지(武備志)’는 영조대왕의 지시로 대구성 축조의 주역이었던 경상감사 민응수가 평안감사로 있으면서 번역했다는 사실은 사람을 더 솔깃하게 만든다. 그리고, ‘대구성’은 ‘화성축성의궤’처럼 국가가 펴낸 문헌은 없지만, 경삼감영이 있었기 때문에, 동래성 보고서인 ‘축성등록’이나, 전주성 보고서인 ‘축성계초’같은 문헌이 있었을 거라는 믿음을 갖게 한다. 임진왜란 이후, 조선의 성제(城制)를 망라한 완벽한 성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대구성’은 세가지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실학사상이 담긴 축성, 나라경제를 생각한 축성, 백성의 살림을 배려한 축성이 그것이다. ‘대구성’은 실학의 태두 반계 유형원의 영향을 받았고, 개혁군주였던 영조임금을 받드는 탕평파 세 남자가 책임감을 갖고 쌓았다. 축성의 주인공은 민응수였지만, 축성을 제안한 인물은 민응수의 전임 조현명이었다. 그는 전주성을 쌓으면서 남긴 [축성계초]로 이론의 근거를 제시했으며, 이후 남한산성이 축성될 때도 주도적 역할을 한 전문가였다. 특히, 전주성 축조 때는 동차(童車)를 개발해 공기를 단축하는 등, 과학적 축성법을 사용했으며, 백년대계를 생각해 다른 성들은 갖추지 못했던 조직인 수성창(修城倉-다른 성들에는 전쟁에 대비한 수성창(守城倉)이 있었을 뿐이었다)을 대구성에 귀뜸했다. 또, 그의 도반이던 정언섭은 동래부사의 자격으로 동래성의 노하우를 전해준다. 이런 인재들의 노력으로 대구성은 탄생되었다.

  또다른 가치는 자금조달의 모범답안이랄 수 있는 요판취이(料瓣取利)로 예산을 자체조달했다는 데서 찾을 수 있다. 이 방법은 60년 후, 정약용이 ‘목민심서’에서 밝힌 판재지법(瓣財之法)의 모태가 된다. 그리고, 백성된 의무를 알리고, 화합으로 참여를 유도했다는 점도 눈에 띄며, 무너진 기왕의 토성들에서 나온 자재들을 재활용하여 경제효과와 생산성을 높힌 점도 놀랍다. 백성의 살림을 배려한 가치는 합리적인 조직개편으로 소외계층을 혁명적으로 동참시켰다는 점이다. 100牌(패)로 나눈 조직으로 기민구제방식을 채택, 승려와 죄수들까지도 건설현장에서 한마음이 되어 땀흘렸다. 이는 조정이 윤허하고, 관찰사가 책임을 지는 공사였기에 한 뜻이 될 수 있었고, 더군다나 농한기를 이용하여 민생이 힘들지 않게 최단기간(5개월)에 축성했다는 사실도 이를 뒷받침한다.

  오랫동안 ‘대구성’을 통해 우리 역사에 대한 이해와, 문화에 대한 발상전환이 필요하다고 생각해 왔다. 정말이지, ‘대구성’을 통해 ‘우리 정신 되찾고, 우리 문화 펼치고, 우리 경제 살리는’ 희망을 다시 지펴보자. ‘대구성’은 관심의 외연을 넓히면서, 대구는 ‘성곽도시’의 일원으로 세계문화도시의 반열에 오르게 될 것이다. 누군가 '결자해지'의 심정으로 심포지움이나 공청회 같은 것이라도 열었으면 하는 마음이다. 위대한 문화콘텐츠는 그런 노력들에서 생겨나는 것이라고 믿는다. ‘경주읍성’이 복원된다는 소식에 놀라서 하는 얘기가 아니라, 더 이상 사라진 안타까움과 지켜내지 못한 아쉬움으로만 우리 문화를 이해하지 말자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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