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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문화적(文化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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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문화적(文化的)

문화와 문화적(文化的)

‘비극(悲劇)’과 ‘비극적(悲劇的)’이라는 말은 다르다. ‘비극’은 비극적 결함(hamartia)을 갖고 있는 전형적 인물이 그려내는, 극형식을 갖춘 이야기이고, ‘비극적’이라는 말은 ‘슬픈 종말’의 다른 표현일 뿐이다. 햄릿, 맥베스의 죽음과 애지중지 키우던 고양이의 죽음이 분명히 다른 비극성을 가지고 있듯이, ‘문화’와 ‘문화적’이라는 표현에 있어서도 그 차이는 분명하다. ‘문화’가 목적이라면, ‘적’이라는 접사가 붙은 ‘문화적’이라는 말은 수단이고, 과정이다. ‘변죽’만 울리고도, 복판을 쳤다고 말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또, ‘다르지 않다’는 암시만으로 모든 것을 알게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문화의 본질 속에는 외롭고, 힘들고, 가슴 아픈 일들이 녹아있다는 것을 변죽만 울리는 이들은 알 길이 없다. 밤을 지새우지 않는 자들이 일출의 장엄함을 모르는 것과 같다. ‘문화’가 차린 밥상에 ‘문화적’이 슬쩍 숟가락을 얹는 일은 최소한으로 줄여야 한다. 그래야 문화가 산다. 문화를 만들어내는 일은 피와 땀의 결정(結晶)임을 알고 있다. 더구나, 정품문화, 진품문화, 명품문화를 가려내는 길은 참 멀고도 험하다. 참된 문화소비자가 되는 일도 힘들다는 이야기다. 진위를 가려내는 노력을 기울여야, 분별심을 가지게 되는 것 아닌가. 문화를 창조한다 해놓고, 문화적인 것만 찍어내는 것은 아닌지, 문화를 판다고 해놓고, 문화적인 것을 파는 건 아닌지, 문화를 소비한다고 해놓고, 문화적인 것만 소비하는 것은 아닌지, 더 나아가 문화를 살린다 해놓고, 문화적인 것만 살려놓는 건 아닌지 마음 아프다.

‘누가 가려낸단 말이냐’ 하면서 비웃는 이들도 보인다. 그들은 흉내만 내는 문화 야바위 노름꾼들이다. 또, 바람잡이처럼 그 이들을 몰래 가려주는 사람도 보인다. 모두 알고 있다. 말하지 않을 뿐이다. 따귀를 올려붙이지 않을 뿐이다. 그나마 자정(自淨)의 노력을 믿고 있을 뿐이다. 아름다움의 가치를 추구하는 일로 볼 성 사나운 모습을 보이고 싶은 이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잠시 덮고 넘어갈 뿐이지, 잊었거나, 용서하거나 화해하는 것은 분명 아니다.

혹시, 문화가 될 수 있음에도, 기울이는 노력들이 부족해서, ‘문화적’인 것에 머무는 것은 없을까 생각해 보자. 어마어마한 예산을 들이고도 고정관념을 벗어나지 못하고 성과 위주로 해나가는 지자체들의 일속에 그런 것이 숨어있다고 생각한다. 계속사업은 왠지 설거지 같고, 신규사업은 해낼 자신이 없어서 지역의 고유한 문화자원을 제대로 캐내고 있지 못한다는 뜻이다. 스토리텔링의 근간을 이루는 지역인물, 지역역사 속에서 순도높은 금맥을 발견하지 못했다는 이야기다. 혹, 행정구역을 넘어가면 지역연계, 지역통합프로그램을 적용할 수 있어도 내 몫만을 생각하는 내주장(內主張)을 넘어서지 못한다.

관객이 연극의 3대 요소이듯이, 문화를 아끼고, 지키고 사랑하는 문화소비자들도 문화를 구성하는 3대 요소에 당당히 자리하게 됨을 알아야 한다. 청중 없는 음악회가 없고, 관객 없는 연극도 의미 없고, 따르는 사람없는 종교와 정치도 맥빠진다. 따라서, 소비되지 않는 문화는 별의미가 없다. 일단 소비가 되어야 ‘누린다’는 표현도 따라간다. 그렇게 되면, 문화도 자존심을 잃지 않고, 용기를 버리지 않고 서서히 변화하게 되는 법이다.

자, 문화가 먼저인가, 문화적인 것이 먼저인가. 모든 일엔 순서가 있어, 아무리 바빠도 바늘 허리 매어 못쓰는 법. 문화의 발전은 생태계의 먹이사슬과는 다름을 알아야 한다. 문화를 흉내 내는 이들은 언제나 ‘청어람(靑於藍)’이라 하겠지만, 이 말만은 교훈 삼기 바란다.

‘간장은 소금보다 짜지 않다’(醬不鹹於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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