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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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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식교수 아침칼럼] 우리나라 불탑의 발생

문정용 2022-05-20 09:26:24

최영식 문화재청 수리기술위원/대구한의대 한문화건축연구소 교수
최영식 문화재청 수리기술위원/대구한의대 한문화건축연구소 교수

■ 대구BBS 라디오아침세상 아침칼럼

■ 최영식 문화재청 수리기술위원/대구한의대 한문화건축연구소 교수

■ 방송: BBS대구불교방송 ‘라디오 아침세상’ 08:30∼09:00

(대구 FM 94.5Mhz, 안동 FM 97.7Mhz, 포항 105.5Mhz)

 

안녕하십니까. 대구한의대학교 한문화건축연구소 최영식교수입니다. 오늘은 우리나라 불탑의 발생에 대하여 알아보겠습니다.

우리나라 사찰의 불탑은 언제부터 어떤형식으로 만들어졌는지, 불교도입시기와 같은 시기인지, 그 재료는 무엇이었는지, 그 형태는 어떠하였는지, 또 어디에서 유래하였는지, 이러한 문제는 실증적인 사료의 부족으로 아직까지 뚜렷이 규명 되지는 못하였습니다.

우리나라의 불탑은 한반도에 불교가 전래되고 가람조영이 시작되면서부터 시작되었을 것으로 볼 수 있으나 당시의 가람이 대부분 목조였던 관계로 오늘날 그 유구를 찾아볼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불교가 우리나라에 전래된 4세기말 중국의 수나라와 당나라를 통한 문물교류가 밀접하였다는 사실과 당시의 중국탑이 목조루각형 탑이었던 사실에 비추어 우리나라 불탑의 초기형식은 고층 누각형 목조탑이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중국의 초기 건탑시기를 3세기인 것으로 미루어 우리나라의 불교전래 시기인 4세기 후반은 중국식 탑파양식이 전수되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시기에 속하는 유례는 찾아볼 수 없고 삼국유사에 그 당시의 탑상을 설화형식으로 요동성육왕탑에 대한 기록을 비롯하여 평양 대보산하의 고려 영탑사와 김해 금관성 파사석탑에 관한 기록이 있습니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요동성육왕탑은 ‘방유토탑삼중, 상여복부, 기목탑칠중’이라 하여 당시 3층의 토탑과 7층의 목조탑이 존재하였고 이 가운데 흙과 돌로 만든 토탑은 위에 솥을 덮은 것 같다하여 인도탑의 형식을 취하였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또 고려 영탑사의 연기 가운데 고승 보덕이 태보산 암혈 밑에서 선관을 하니 신인이 와서 청하기를 이곳에 거주하라 하고 석장을 앞에 놓고 그 땅을 가리키면서 말하기를 이 속에 팔면칠급의 석탑이 있다 하여 땅을 파보니 과연 그러하여 정사를 세워 영탑사라 하고 그 곳에 살았다고 한 내용은 이때의 탑이 바로 8각 평면에 7층으로 건조한 석탑으로 생각됩니다.

특히 고려시대에 들어와 평양을 중심으로 한 고구려 영역에서 다각다층석탑이 건립되는데 영탑사 8각7층석탑도 이들 석탑 중 하나인 것으로 짐작됩니다.

이와 같은 북쪽 고구려 계통의 기록과 함께 남쪽의 경상도 지방에서는 김해 금관성 파사석탑에 관한 내용이 있어 주목됩니다. 김해 호계사의 파사석탑은 수로왕비 허황후가 서역 아유타국에서 신을 달래기 위하여 싣고 온 것으로 ‘탑방사면오층 기조 심기석미적반색 기질양, 비차방류야’라 하여, 이에 따르면 이탑은 적갈색의 반문을 지닌 인도탑으로 조각이 복잡하였던 것으로 짐작이 됩니다. 여기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이미 가락국에 해로를 통한 인도의 탑이 들어왔다는 것입니다.

미술사학자이신 우현 고유섭선생은 건무24년이라는 연호가 맞지 않기 때문에 이러한 사실 자체를 황당무계하다고 하였지만 가락국기에 의하면 ‘나는 아유타국의 공주이고 성은 허씨, 이름은 황옥, 나이는 16세다’라는 기록으로 보아 좀더 관심을 갖고 살펴보아야 할 부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유타국은 인도 갠지스강 중류에 있던 나라이고 김해의 수로왕릉 정문 조각에 있는 어문이 인도의 문양과 같다는 것을 참고한다면 단순히 연대가 맞지않다고 허술히 넘길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오늘은 우리나라 불탑의 발생에 대하여 알아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