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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찰탐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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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공산 파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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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왕실의 원찰 파계사

동화사의 말사인 파계사는 신라 애장왕 5년(804년) 심지왕사가 창건하였다. 절의 이름은 절의 좌우 계곡에서 흐르는 물줄기가 9군데나 되므로 이 물이 흩어지지 못하게 잡아 모은다는 뜻에서 파계사라 이름하였다고 한다.
입구는 진동루 누문을 지나 절마당에 들어가면 중심 전각이 원통전이다. 관세음보살을 주불로 모신 특이한 사찰임을 알 수 있다. 원통전 현판 글씨는 장중한 필체로 송우암과 송동춘의 서체인 양송체에 해당한다. 적묵당과 설선당이 동서 요사인데 적묵당에 종무소 간판이 걸려있다.
순조 6년(1806년)에 경상도 관찰사 김희순이 써넣은 ‘영종대왕 원당 사적’이란 사적기에 의하면 이 파계사는 숙종 19년 계유 10월 5일 밤에 숙종 대왕이 ‘산승(山僧)이 대전(大殿)에 들어오는’ 꿈을 꾸고 남대문 밖에 나가 스님이 있는지 알아보게 하니 마침 파계사의 영원선사가 묘향산에 들렀다가 돌아오는 길에 남문 밖에서 쉬고 있었다. 이를 기이하게 여긴 숙종은 그를 수락산에 보내 백일 칠성기도로 왕자를 얻도록 빌게 하였더니, 숙빈 최씨에게 태기가 있어 이듬해 갑술(1694년) 9월 13일에 영조가 태어났다는 것이다. 그래서 숙종은 영원 선사에게 현응이란 시호를 내리고 파계사를 숙빈궁의 원찰로 하여 내탕금 3천냥으로 칠성전을 짓게 하고 영조가 11세(1704년) 때에 친필로 자응전이란 현판을 써 붙이게 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22년(1696)에는 기영각을 지어 열성 위패를 봉안하게 함으로써 왕가의 원찰로 격상시켜 놓았다. 이후 영조가 등극하자 왕비인 정성왕후는 그 내력을 알고 이 절을 자신의 원찰로 삼은 다음 영조 8년(1732년)에는 영조의 어의를 하사하는 등 각별한 후의를 베풀어 왕실의 원찰로 확고한 지위를 다져 놓는다. 그래서 이곳이 관음기도 도량이 되어 원통전이 중심 전각이 되었던 것이다.
원통전은 조선 선조 때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것을 선조 38년(1605년)에 계관법사가 중창하고, 숙종 21년(1695년)에 현응조사가 다시 고쳐지어 오늘에 이르렀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으로 자연석 주초 위에 둥근 기둥을 세웠다.
개금불사때 발견된 한지 두루마리에 적힌 발원문에 의하면 ‘건륭 5년(1740년) 경신년에 대법당을 개금하고 불상과 나한을 중수했으며, 성상(聖上)의 청사상의(菁紗上衣)로 만세유전을 빌면서 복장한다’고 기록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