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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찰탐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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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림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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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곡군 동명면 구덕리 96-1번지에 위치한 전통사찰(등록가-87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팔공산순환도로변에 잇는 신라고찰로서 대구와 가깝고 교통이 편리해 가족단위의

관광객이 많이 찾아오는 절인데 조선 세종때에는 교종, 선종 36사의 하나에 포함된

사찰이었으나 조선후기에 들어서는 조계종 제9교구 본사인 동화사에 자리를 넘겨주고

그 말사가 된 절로서 544년(진흥왕5) 진나라에서 귀국한 명관이 중국에서 가져온

불사리를 봉안하기 위해 창건한 사찰이다. 그 뒤 대각국사 의천이 1092년(고려 선종9)에

중창했고 1243년(고려 고종30) 몽고군에 의해 폐허가 되었다가 다시 중창했으나

1597년(선조30) 왜병들의 방화로 가람이 소실되었고 1686년(조선 숙종12)에 기성대사에

의해 대웅전 과 명부전이 중창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는데 대웅전 동쪽 약 50m지점의

도로변에는 기성대사를 기리는 높이 2m의 비석과 부도 4기가 있다.

대웅전의 편액은 숙종대왕의 어필이며 대웅전안에는 3백년쯤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높이 3m의 향목불상 3좌가 있는데 이렇게 향나무로 만들어진 불상은 국내에서

찾아보기가 힘들며 규모가 큰 것에 속한다고 한다.

대웅전은 정면 5칸과 측면 3칸으로 된 중후한 건물로 겹처마 맞배지붕으로 되어 있다.

국내에서 가장 큰 명부전(절 안에 십왕을 봉안하는 집)은 대웅전 동편에 서향으로 있고,

정면 5칸, 측면 3칸으로 된 홑처마, 맞배지붕이며, 오역(五逆)의 대죄를 범해 교화를

바랄 수 없는 무리를 심판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으며 대웅전에서 서쪽으로 약 100M 떨어진

밭 가운데에는 윗부분이 부러져 60×50㎝가량의 둘레로 90㎝정도만 남아있는 송림사 당간지주

2기가 서 있는데 송림사 창건당시에 만들어진 것이 아닌가 추측되며 따라서 과거 송림사의 입구가

그 곳이었을 것이고 이것으로 보아 송림사의 규모가 얼마나 컸는지를 입증해 주고 있다.



절 주위에는 소나무가 울창하고 옆계곡에 흐르는 맑은 시냇물과 함께 대구 근교의 고찰을 찾아드는

사람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송림사에는 다음과 같은 창건 설화가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몹시 추운 겨울날, 어느 마을 부자집에 초상이 났다. 장사 전날 밤 상주의 꿈에 어떤 노인이

나타나 "내 시키는대로 한다면 너의 집안은 복을 누릴 수 있지만 그렇지 않으면 큰 화가 미칠

것이다. 장례를 끝마치기 전에는 누구에게도 물건이나 음식을 주지마라"는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 조상님이 현몽한 것으로 믿은 상주는 조문객이나 인부들에게 음식을 못먹게

했으며 장례식이 채 끝나기도 전에 음식을 챙겨 인부로 하여금 집으로 가게 했다. 그러나

인부를 시킨 것이 걱정이 되어 자신이 직접 뒤쫓아 가기로 하고 남아 있는 인부들에게

장례물건을 절대로 다른 사람에게 주지말 것을 신신 당부했다. 산에서는 인부들이 허기

속에 일을 마치고 지푸라기 하나 남기지 않고 모두 태우기 시작했다. 이 때 갑자기 위에

아무 것도 걸치지 않은 거지 아이가 모닥불 옆으로 다가와 떨며 애원했다. "오늘밤 얼어

죽을 것 같습니다. 제발 그 가마니 한 장만 주십시오. 측은한 마음이 든 인부들은 상의 끝에

헌가마니 한 장을 줘 보내고 연장을 챙겨 막 내려오고 하는 순간 펑! 하는 소리와 함께 거지

아이가 가고 있던 그 자리에는 웅장한 절이 생기고, 가마니는 그 절의 대웅전에 걸려 있었다.

그 후 과연 그 상주 집안은 점점 몰락하고 대도 끊기고 말았다. 그러나 거지 아이에게 온정을

베풀어 주었던 인부들은 점점 살림이 일고 자손도 번창하였으며 소나무숲에서 생긴 절이라

하여 '송림사(松林寺)'라 하였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