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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가 품은 우리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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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차의 본향 하동, 쌍계사와 칠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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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5회 하동 쌍계사, 칠불암

섬진강과 하동군

하동(河東)이란 지명은 섬진강의 동쪽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하동군지>>에는 섬진강의 역사가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552년 10월에 백제 성왕이 부여에 있던 불상 3위와 불경을 왜국의 흠명왕에게 보냈는데, 사신이 구례에서 다사강(섬진강의 옛 이름)으로 내려와 다시진에서 왜국으로 떠났다. 백제의 수도 부여로 가는 내외 사신들이 다사진에서 다사강을 역류하여 강좌우로 전개되는 아름다운 산천을 찬탄하였다고 한다. 고려 초(992년경)에 두치(豆置, 豆恥)강으로 이름이 바뀌고, 고려말(1383년 5월이전)에 섬진(蟾津)강으로 이름이 다시 개명되었다.

여름철 장마 때면 섬진강은 흙탕물이 급히 흘러와서 곡성군 오창면에서 하동 하구까지 1백75리는 온통 홍수로 강좌우 평야가 물바다가 되어 사람과 가축과 집들이 막대한 피해를 입는다. 하동군은 고래로부터 읍 자리를 20여 차례나 산록 깊숙이 각처로 전전하며 이동하는 곤욕을 치러야 했는데, 이는 홍수와 더불어 가야와 백제 국경분쟁에 따른 사태 때문이었다. 하동군은 이에 따라 다사읍(현 악양면 정서리)과 신다사촌(현 고전면 고하리)으로 중심지가 양분되었다.

섬진강의 발원에 대해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마이산 서쪽 봉우리에서 발원하여 남원부 진수진 남쪽으로 흘러 진주 화개현의 서편에서 용왕연이 되고 조수에 닿는다. 또 현 남쪽 55리를 섬진이라 하는데 그 동안이 진주 악양현과 경계를 이루며 동남으로 바다에 닿는다. 고려시대에는 이 강을 배류하는 삼대 강의 하나라고 적고 있다.

다사강이 섬진강으로 이름이 바뀐 내력에 대해서는 몇 가지 전설이 전해 오고 있다. 고려 말 왜구의 침입이 극심할 때였다. 왜구들이 다사강을 거슬러 오르면서 노략질을 할 참이었다. 그 때 수만 마리의 두꺼비들이 지금의 다압면 섬진마을 나루터로 몰려들어 울어 제치는 바람에 왜구들이 겁을 먹고 도망친 이후부터 두꺼비 섬(蟾)자를 넣은 섬진강으로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 그 중의 하나다.

재첩 ; 은어와 함께 섬진강의 명물로 등장한 재첩은 바닷물이 들어오는 강에 서식하는 민물조개다. 재첩은 섬진강, 낙동강, 영산강 등 우리나라 여러 지역에서 서식하였으나 수질 오염으로 섬진강을 제외한 다른 지역에서는 사라지고 있다. 섬진강에서는 370여 가구에서 연간 400t을 채취하고 있다. 5~8월 뻘이 섞인 모래 속에 산란하여 1년 반 정도 살다가 죽는다. 부산, 김해 지방에서는 재치라 하고 김포지방에서는 가막조개. 전남 보성에서는 갱조개라 한다. 바닷조개에 비해 영양과 약효가 월등하다는 소문이 전국에 알려지자 지금 하동 재첩은 황금 알을 낳는 거위가 되고 있다.

 

하동군 ;

이 군의 지형은 섬진강의 동쪽에 형성되어 있어 강의 흐름에 따라 남북으로 길고 동서로는 폭이 좁다. 북쪽은 1500m이상의 높은 산지들이 모여서 지리산 국립공원을 형성하고 있다. 하천은 서쪽 경계를 이루며 북에서 남으로 흐르는 섬진강을 중심으로 해서 덕천강, 화개천, 황천강, 악양천 등이 모두 섬진강으로 유입되어 남해로 빠져든다. 연평균기온은 12.8도, 1월 평균기온 0,2도, 8월 평균기온 25,3도로 온난하면서도 그렇게 덥지 않은 편이다. 섬진강 하류는 우리나라의 최대 다우 지역이어서 연평균강우량이 1627mm에 이른다.

높은 산지로 이루어져 경지 면적이 좁아 논농사보다는 밭농사 위주의 농업이고 산간지방에서 채취한 산나물, 약재, 밤 및 대나무 등이 유명하다.

수산업으로서는 광양만 공단의 폐수로 피해를 입고 있으나 멸치, 가자미, 갈치 등이 많이 잡히고 특히 김 양식이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

이 지방은 고려시대부터 도자기의 원료가 되는 고령토가 많이 생산되었는데 그 질과 매장량에 있어서는 세계적이라 한다. 특히 옥종면의 광산들은 노천광산으로 채굴비용이 저렴하여 경제성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화개면 일대에서 생산되는 차는 신라 흥덕왕 때 당나라에서 그 종자를 가져와 화개에 심게 했다는 기록이 삼국사기에 전한다. 정약용도 화개 차에 대한 글을 남기고 있다. 이곳의 차는 대체로 곡우를 전후한 20일 정도에 따서 화개계곡에 흩어져 있는 제다공장에서 덖어서 작설차로 많이 만든다.

쌍계사 (경남 하동군 화개면 운수리)

대한불교조계종 제 13교구 본사로 지리산 남쪽 기슭에 있다.

723년(신라 성덕왕 23) 의상의 제자인 삼법 스님이 창건했다고 알려져 있다. 삼법은 당나라에서 귀국하기 전에 '육조 혜능의 정상을 모셔다가 삼신산의 눈 쌓인 계곡 위 꽃이 피는 곳에 봉안하라'는 꿈을 꾸고 혜능의 머리를 취한 뒤 귀국했다고 한다. 귀국해서는 한라산, 금강산 등을 두루 돌아다녔으나 눈이 있고 꽃이 피는 땅을 찾지 못했는데, 지리산에 오자 호랑이가 길을 안내하여 이곳에 이르게 되었다. 이곳이 꿈이 계시한 자리임을 깨닫고 혜능의 머리를 묻은 뒤 절 이름을 옥천사라고 했다고 한다. 그 뒤 830년(흥덕왕 5)에 진감국사 혜소가 중국에서 차의 종자를 가지고 와서 절 주위에 심어 차의 고장으로 만들고 절도 중창하여 대가람의 면모를 갖추게 했다. 836년(정강왕 1) 이웃에 있는 절과 혼돈을 피하기 위해 이름을 쌍계사로 바꾸었다. 절 좌우에서 흐르는 개울물이 쌍계천을 이루고 이 물이 다시 칠불암 쪽에서 흘러오는 화개천에 유입되는 겹 쌍계의 형국을 이루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벽암이 1632년(인조 10)에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외의 것은 사적기가 남아 있지 않아서 잘 알 수가 없다. 현재 43개 말사를 관장하고 있으며 국사암, 불일암, 칠불암 등 부속 암자를 거느리고 있다.

현존하는 건물로는 대웅전(보물 제 500호)를 비롯하여 명부전(경남도 유형문화재 제 123호), 팔상전(경남도 유형문화재 제 87호), 노전, 적묵당(경남도 유형문화재 제 46호), 설선원(경남도 문화재자료 제153호), 나한전(경남도 유형문화재 제124호), 육조정상탑전(경남도 유형문화재 제125호), 청학루, 천왕문(경남도 유형문화재 제 126호), 금강문(경남도 유형문화재 제 127호), 일주문(경남도 유형문화재 제 86호) 등이 있다. 문화재로는 진감선사대공탑비(국보 제 47호)를 비롯하여 팔상전 영산회상도(보물 제 925호), 부도(보물 제 380호), 석등(경남도 유형문화재 제 28호) 등이 있다.

 

쌍계석문(雙溪石門)

 

주차장에서 오른 쪽으로 흐르는 화개천을 건너면 사하촌이 시작된다. 각종 상점과 식당들이 밀집한 상가를 지나면 커다란 두 개의 바위가 우뚝 솟아 있고 그 사이로 사람들이 다니는 길이 나 있다. 각각의 바위에는 쌍계와 석문이란 글자가 새겨져 있다. 전설에 따르면 고운 최치원 선생께서 이곳에 들어오면서 짚고 있던 지팡이로 쓴 글씨라고 한다. 진위 여부는 알 수 없지만 글씨가 가늘고 깊고 힘이 느껴지기 때문에 생겨난 전설인 것 같다.

 

일주문(경남도 유형문화재 86호)

 

사찰의 경내임을 알리는 최초의 건축물이다. 기둥이 일렬로 서 있기 때문에 일주문이라고 한다. 쌍계사 일주문은 1641년 벽암스님이 세웠다. 지금 것은 1977년 고산스님이 고쳐 지은 것이다. 다포계 팔작지붕에 ‘삼신산쌍계사’라는 예서체의 현판이 걸려 있다. 해강 김규진의 글씨다.

금강문 (경남도 유형문화재 제 127호)

 

보편적인 사찰과 마찬가지로 일주문과 천왕문사이에 자리 잡고 있다. 금강문은 천왕문과 함께 사원으로 들어가는 길목에서 불법을 수호하고 사악한 것을 막아내며 속세의 더러움을 씻어내는 정화의 장소다. 이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익공계 단층 겹처마 맞배지붕으로 되어 있다. 앞면의 중간 칸은 틔어서 통로로 사용하고 좌우 양 칸은 벽으로 막아 금강역사와 문수, 보현보살을 안치하였다. 옛날에는 금강역사를 한 명을 지칭하는 경우도 있었으나 오늘날에는 보통 두 명으로 보고 있다. 입을 벌린 아상을 금강이라 하는데 금강저를 갖고 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입을 다문 음상은 강력한 힘을 과시하기 때문에 역사라고 부른다. 금강역사상의 안쪽에 사자를 탄 문수보살과 코끼리를 탄 보현보살이 동자 상으로 묘사되어 있다. 이 문 역시 벽암스님이 짓고 1979년 고산스님이 중수 했다.

천왕문 (경남도 유형문화재 제 126호)

 

금강문과 같은 때에 지어진 조선 후기의 건물이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익공계 단층 맞배지붕의 목조 건물이다. 가운데 칸은 틔어 통로로 사용하고 좌우 양 옆 칸은 벽으로 막고 안 쪽에 사천왕상을 안치했다.

사천왕은 수미산의 중턱에 있는 사왕천에 살면서 사방 사주를 수호하는 호법신이다. 4천하를 돌아다니면서 사람들의 거동을 살펴서 이를 도리천의 주인인 제석천에게 보고하는 일을 수행 한다. 사대천왕, 호세사천왕, 사대왕중천, 사왕이라고도 한다. 동은 지국천왕, 서는 광목천왕, 남은 증장천왕, 북은 다문천왕의 4존으로 형성되어 있다. 이곳의 사천왕상은 나무를 다룬 솜씨가 뛰어나 생동감이 넘치며 무섭기 보다는 친근감이 감돈다. 이 건물은 1704년(숙종 30)에 백봉스님이 창건하고 1825년(순조 25)에 인정스님이 중수한 것을 1978년 고산스님이 다시 고쳐 지은 것이다.

 

팔영루(八詠樓) (경남도 문화재자료 74호)

 

맞배지붕에 정면 5칸, 측면 3칸의 2층 누각으로 되어 있다. 중국의 범패를 익히고 연구해서 돌아온 진감선사가 이곳에서 우리말과 음률에 맞는 불교음악을 만들어 보급시켰다. 진감선사가 섬진강에 뛰어노는 물고기들을 보고 8음률로써 어산 범패를 만든 것을 기려 팔영루라 이름 지었다. 1층은 출입문과 서점으로 사용되고 누마루로 된 2층은 강당으로 Tm고 있는데 중수기와 시를 새긴 편액들이 곳곳에 걸려 있다. 벽암스님이 중창 한 것을 고산스님이 지금의 형태로 다시 지었다.

 

진감국사대공탑비 (국보 제 47호)

 

이 비는 임진왜란과 6.25로 인해 손상을 입은 것을 현재 스텐레스 강철로 틀을 짜 보호하고 있는 상태다. 높이 3.63m, 비신 높이2.13m, 너비 1.03m, 두께 22.5cm의 거대한 비다. 신라 말의 명승 진감선사 혜소스님의 비로 887년(진성여왕 1)에 건립되었다. 보기 드물게 귀부와 이수 및 탑신이 완전한 탑비다. 신라 말기에 나타나는 탑비의 양식에 따라 거북의 머리가 용의 머리로 변했고 짧은 목을 하고 있다. 네모난 대석을 딛고 있는 귀부의 네발은 주름잡힌 긴 발로 되어 있다. 귀부의 등에는 6각의 귀갑문이 크고 간편하게 조식되어 있고 그 중앙에 마련된 비좌의 4면에는 운문을 조식하여 비신을 받게 하였다. 비신 정상에 놓인 이수는 양측이 비스듬히 역삼각형이 되고 4면에는 보주를 희롱하는 반룡이 힘차게 조각되었다. 이수 정면 가운데는 네모지게 제액을 만들어 <海東故眞鑑禪師碑>라는 비명이 양각되었으며, 그 위로 앙련판위에 보주를 얹었다.

현재 남아있는 비문은 많은 손상을 입어 글자가 확실치 않으나 1725년(영조 1)에 목판에 옮겨 각자된 비문을 판독하면 887년(신라 정강왕 2)에 건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

진감선사 혜소(眞鑑禪師慧昭)

 

비문에 의하면 진감선사 혜소는 신라 혜공왕 10년(774)에 태어나 문성왕 12년(850)에 열반에 든 대선사로 한국 불교음악의 창시자다. 그의 속성은 최씨로 선조는 중국 산동성에 살다가 수나라가 고구려를 침공할 때 귀화한 사람이다. 전주 금마 즉 지금의 익산 사람이다. 36세 때 세공사의 노꾼으로 당나라에 건너가 창주 신감선사의 제자가 되었다. 동방성인 혹은 흑두타로 불리면서 존경받았다. 종남산에 들어가 짚신을 삼아 행인들에게 3년간 보시하고 흥덕왕 5년(830)에 귀국하여 상주 노악산 장백사에 주석하면서 남종선을 펼치다 이곳으로 이거했다. 민애대왕이 보위에 올라 발원을 의탁하자 “선정을 베풀면 되지 무엇 때문에 따로 발원 하리오”했다, 이에 왕은 크게 뉘우치고 선사는 색과 공 둘 다 해소되고 정과 혜가 함께 원융 되었다며 慧照라는 호를 하사했는데, 피휘 하여 조를 소로 바꾸었다. 왕은 선사를 국사로 대황룡사에 초빙했으나 끝내 응하지 않고 노을 진 언덕에 기대어 구름 낀 시내가 내려다보이는 이곳에서 제자들을 길러내는 데만 전념하였다. 6조의 영당을 건립하여 자신의 법맥의 근원을 밝히고 대중4년(850) 정월9일 새벽 한 마음(一心)이 근본이니 문도들은 여기에 힘쓰라는 유지를 남기고 앉은 채 열반에 드시니 세수 77세 법랍41세였다.

대웅전 (보물 제 500호)

 

정면 5칸, 측면 3칸의 방형 단층 팔작지붕의 다포계 형식이다. 막돌로 높이 쌓은 석축 위에 기단을 놓고 세운 집이다. 기둥은 배흘림이 없이 높게 세워지고 활주로 처마의 무게를 받치게 했다. 평방 위에 배치한 공포는 안 쪽의 3칸은 두 개씩이고 좌우 협칸에는 한 개씩으로 되어 있다. 내부 천장에는 우물반자를 짜 올렸고, 중앙 뒤축에는 불단을 꾸미고 있다. 불단 위에는 3칸 닫집을 짜서 그 아래에 용, 연화 등의 조각을 늘어뜨렸다. 단청은 금단청으로 화려하다. 정면 중앙 3칸에는 각각 4분합의 빗살문이 달려 있고, 좌우 협칸은 우물살문으로 되어 있다. 그 위 창방 밑에는 교창이 설치되어 있다.

불단 위에는 삼세불, 즉 중앙의 석가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아미타불과 약사불 좌상을 모시고 그 사이에 관음 세지, 일광, 월광 4보살을 모셨다. 2002년 11월 개금불사 때 발견된 복장기에는 1639년(인조17) 청헌스님의 주도로 11명의 화승이 참여한 것으로 되어 있다. 삼세불 중 아미타불은 조성시기와 재료, 양식 등이 다른 불상과는 달라 보물지정에서 제외되었다. 윤곽이 오밀조밀하고 날렵한 이목구비에 목이 길고 어깨가 두껍고 가슴이 넓고 당당하고 무릎이 장대한 데서 제작 당시 양식이 잘 나타나 있다 하겠다. 아미타불은 상하가 비슷하게 길어진 풍후한 얼굴, 짧은 목과 허리, 두 손을 모두 무릎 위에 대는 모습 등에서 영, 정조 연간의 양식 기법을 보이고 있다.

 

금당(경남도 유형문화재 125호)

 

금당은 6조 혜능의 정상사리를 봉안하였다고 정상사리탑전이라고도 부른다.

정면 3칸, 측면 2칸 팔작지붕의 다포계 건물이다. 자연석 주초에 기둥은 약한 배흘림으로 되어 있다. 운두가 낮아 전체적으로 납작한 감을 준다.

처마 밑에 걸려있는 ‘六祖頂相塔’과 ‘世界一花祖宗六葉’ 이란 현판글씨는 추사의 친필로 알려져 있다. 추사의 글씨가 이곳에 있게 된 소이연은 이절에 주석하던 차의 달인 만허스님이 차를 보내오자 그 보답으로 다종 일구를 보내어 육조전에 차를 공양케 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그때 글씨도 함께 보낸 것으로 보고 있다.

금당 안에는 육조정상석탑이 있다. 진감선사 비문에는 분명히 육조의 영당을 짓고 진영을 모셨다고 되어 있는데, 세상에는 육조 혜능의 두골이 모셔져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능화는 <<불교통사>>에서 신라 성덕왕 21년(722) 당나라 홍주 개원사의 신라 승 김대비가 장정만에게 이십천금의 뇌물을 주어 육조대사의 머리를 가져오게 하여 해동으로 돌아와 공양하게 한 것이 지금 금당 안의 정상탑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진감선사가 육조영당을 지었다는 내용이 세인들에게 육조대사의 두골을 공양하는 것으로 와전 된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육조정상탑으로 알려진 7층 석탑은 1886년 용당이라는 스님이 목압사에 있던 것을 이리로 옮겨온 것이다.

마애불(경남도 문화재자료 48호)

 

대웅전에서 반야실로 가는 중간, 명부전 옆 바위에 마애불상이 고부조로 조각되어 있다. 큰 바위의 한쪽 면을 감실처럼 다듬어서 그 안에 돋을새김으로 여래 상을 모셨다. 큰 머리에 육계가 벙거지를 쓴 것처럼 솟아있고 통통한 얼굴에 귀는 살아 있는 인물처럼 오목하다. 내려뜬 눈에 코와 입이 자그맣게 표현되어있다. 짧은 목에 두꺼운 법의는 가슴이 네모지게 파여 있고 옷 주름을 단순화 시켰다. 손은 법의로 두껍게 덮여 있어 수인을 알 수 없지만, 선정인을 짓고 있는 것 같다. 결가부좌한 다리도 불분명한데 전체적으로 보아 조선 후기에 조성된 불상들과 비슷한 모습이다.

부도 (보물 제 380호)

쌍계사 북쪽 산봉우리의 능선을 7m 방형으로 닦아 2단의 석단을 축조하고 그 중앙에 부도를 건립하였는데 높이가 2m에 이른다. 석축 자체의 규모와 형식, 주변 상황으로 보아 현재의 자리가 원래의 위치인 것 같고, 비교적 원형이 잘 보존된 형태이다.

부도의 구성은 상, 중, 하대로 형성된 기단 위에 탑신부와 상륜부를 놓은 8각원당형 부도이다. 지대석은 윗면만을 치석하여 옆면은 거칠게 남아 있고, 8각 하대석의 옆면은 치석만 하고 아무런 장식이 없다. 8각의 각모서리에 1판씩 모두 8판의 복엽 연화문을 조각한 연화대를 이루고 있다. 복련대 윗면은 높직한 굄대를 마련하여 중대를 받게 하였다. 중대석은 8면에 안상이 한 구씩 음각되어 있을 뿐 아무런 조식이 없다. 상대석은 아랫면에 2단씩 각형 받침을 조각하고 앙련대를 이루었으며 8각의 각 모서리에 하대석의 복련과 마주하게 하였다. 탑신 굄석은 높직한 8각대로 별도의 돌로 만들어 끼어 넣었다. 이 굄대의 측면에는 구름문양을 빈틈없이 채워 놓았다. 이 위의 8각 탑신은 아무런 조식이 없다. 옥개석 역시 8각으로 아랫면에 널찍한 받침이 있고 추녀는 직선형으로 귀꽃이 조각되어 있다. 옥개석 정상에는 굵은 운문이 조각되어 있다. 상륜부는 옥개석을 축소한 것 같은 동일한 양식의 보개가 있고 그 정상에 높직한 간주가 표시되어 있다. 맨 위에는 커다란 보주를 장식하였다. 상륜부는 모두 하나의 돌로 되어 있다. 이 부도는 이곳 진감선사의 묘탑인 대공탑으로 추정된다.

 

국사암

 

금당에서 북쪽으로 등성이 하나를 넘으면 국사암이다. 쌍계사와는 전혀 분위기가 다른 아늑하고 고즈넉한 별개의 세계다. 많은 사람들이 진감선사가 상주 노악 장백사에서 지리산으로 옮겨와 삼법 스님이 머물던 옛 절터 지었다는 옥천사를 이곳으로 추정하고 있다.

전설에는 진감선사가 목기러기 3마리를 날려 절터를 알아보았더니 한 마리는 목압마을에 한 마리는 쌍계사터에 다른 한 마리는 국사암터에 앉았다고 한다.

목기러기가 앉은 3곳에 절을 지었는데 그것이 목압 마을의 목압사. 쌍계사의 육조영당, 이곳의 옥천사라는 것이다. 지금은 모두 잊혀지고 단지 국사가 기거했기 때문에 국사암이란 이름으로 남게 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건물로는 인법당을 비롯하여 문수전, 산신각, 요사 등이 있다.

큰방에는 단아한 모습에 비례가 적절한 목불상이 모셔져 있다. 원만한 얼굴에 미소를 머금은 얼굴은 이지적인 냉철함이 엿보인다. 수인은 항마촉지인에 설법인을 겸하고 있는데 무척 편안한 자세다. 좌우 협시는 쌍상투를 튼 문수, 보현 동자상이다. 삼존상 모두 영,정조 시기의 우수한 작품이다.

절 앞에는 진감선사가 짚고 다니던 지팡이에서 싹이 나 자랐다는 느릅나무가 있다. 둥치가 네 방향으로 뻗어 사천왕수라 불리고 있다.

칠불암

대한불교조계종 13교구 본사인 쌍계사의 말사다. 칠불선원, 또는 칠불사라고도 한다. 이 절의 창건에는 몇 가지의 설화가 전해지고 있다. 연담의 <칠불암 상량문>에 의하면, 신라 신문왕 때 지리산 옥부선인이 부는 옥적의 소리를 들은 일곱 명의 왕자가 입산하여 6년 만에 도를 깨닫고 이 암자를 창건했다고 한다. 그러나 세상에 전하기는 옥보선사(일명 장유화상)를 따라 출가한 가락국 수로왕의 7왕자가 지리산에 운상원을 짓고 수행하여 6년 만인 103년(파사왕 24)8월 보름에 성불하였기 때문에 칠불암으로 이름을 바꾸었다고 한다. 또 진응의 <<지리산지>>에 는 '지리산은 칠불조사인 문수보살이 머무는 곳이기 때문에 칠불암이라고 한다'고 하였다. 이 중 가락국 7왕자 성불 창건 설화가 가장 많이 채택되고 있다. 또 옥보고가 이 절의 운상원에서 50년 동안 거문고를 공부하고 30여곡을 지어 세상에 전하였다고 한다.

창건 이후 이 절은 수도승들의 참선 도량으로 많이 이용되었다. 1568년(선조 1)에 부휴선사가 중창하였고 1830년(순조 30)에는 금당과 그 제자인 대은이 중창하였다. 1907년에는 승려들이 흩어졌다가 1910년에 다시 절을 크게 열었는데 이때 서기룡이 이 절의 당우를 수리하였다. 1948년 여순반란 사건으로 완전 소실되었다. 김선신의 <<두류전지>>에 의하면 당시 비로법전, 고승당, 약사석불, 부휴조사 치아탑, 조능의 부도 등이 있고 11동의 건물이 잇달아 있어서 비를 맞지 않고도 다닐 수 있었다고 한다. 그 뒤 수년 동안 재건되지 못하다가 현 주지가 16년의 각고 끝에 문수전, 보광전, 선원 등의 건물을 중창하였다.

 

아(亞)자방 (경남도 유형문화재 제 144호)

 

칠불사 경내에 있는 선원이다. <<칠불선원사적기>>에는 신라 제 6대 지마왕 8년(119)에 지었다는 설도 있으나 신라 효공왕 때 담공 선사가 특이한 방법으로 이 아자방을 축조하였다고 한다. 담공 선사가 만든 이 온돌은 이중구조의 구들로 길이가 8m이고 네 모서리의 높은 곳은 좌선하는 곳이며 중앙의 十자형 낮은 곳은 경행 처인데 10여명이 수행할 수 있는 넓이이다. 5칸 집에 두 칸은 부엌이고 3칸은 하나의 방으로 되어 있다.

이 온돌은 만든 이래 1000년 동안 한 번도 개수한 일이 없는데도 겨울 동안거가 시작되는 10월 보름날 불을 지피면 해제 때인 다음해 정월 보름까지 상하 온돌과 벽이 같은 온도로 따뜻했다고 한다. 100년마다 한 번씩 물청소를 한다고 한다. 서산대사가 이 방에서 좌선하였고 전한다.

 

평사리와 소설<<토지>>

 

하동과 화개의 중간쯤에 백두산에서 시작된 백두대간이 혼신의 힘으로 지리산을 일으킨 후 바다로 잦아들기 직전 가쁜 숨을 고르면서 쉬는 듯한 장소가 악양이다.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산 남쪽에 화개동, 악양동이 있다. 모두 다 사람이 살고 산수가 대단히 아름다운 곳이다"라고 했다. 이 곳은 산, 들, 바다, 강 어느 것 하나 풍성하지 아니한 것이 없다. 이렇게 풍요롭고 평화스런 악양 땅, 형제봉 기슭에 평사리가 자리 잡고 있다. 평사리는 서북쪽을 지리산의 준령들이 병풍처럼 에워싸고 서쪽으로는 섬진강이 유장하게 흘러가고 남쪽은 시루봉에서 발원한 악양천이 빚어낸 악양 들판을 시원스레 내려다보고 있어서 대하소설 <<토지>>의무대로 선정된 것 같다. 본래 평사리는 웃평사(상평)와 아랫평사(하평)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지금은 웃평사와 외둔을 합쳐 평사리라 하고 아랫평사와 대촌을 묶어서 봉대리로 부르고 있다.

소설에 묘사된 정경과 우리나라 마을의 구조를 대비시켜볼 때 웃평사가가 토지의 무대로 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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