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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가 품은 우리역사

폐사지를 찾아 떠나는 여행-002(흥륜사지) 상세보기

폐사지를 찾아 떠나는 여행-002(흥륜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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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현재 우리나라에 조사된 절터가 2,000여 곳이고 그 중 600여 곳이 경상도에 있으며 또 그중에서 300여 곳이 경주에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절터를 이야기 할 때 많은 사람들이 한국 불교의 요람이라 할 경주에 큰 비중을 두는데 누가 뭐래도 한국 불교하면 신라 불교를 떠 올리고 신라불교하면 경주를 연상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 칼럼도 신라 최초의 사원인 흥륜사부터 시작합니다.

 

흥륜사라면 경주 시내에 지금도 있는 절인데 왜 흥륜사를 절터라고 할까요?

 

흥륜사는 워낙 이름난 절이 돼나서 애매모호한 점이 참 많습니다. 지금 오릉 북쪽에 있는 흥륜사는 1970년대 초에 혜해 스님이 천경림 선원을 개원하면서 사찰의 규모를 갖춘 비구니 사찰입니다. 그러니까 흥륜사는 불국사나 동화사처럼 지속적으로 법맥이 이어져 내려온 것이 아니고, 절이 폐사되는 바람에 그 맥이 단절되어 버린 곳입니다. 거기다 지금의 장소는 신라 때의 흥륜사 자리가 아니라는 설이 강하게 제기되고 있습니다.

 

현재의 흥륜사를 창건하신 혜해 스님이 민가였던 그곳을 매입해서 선원으로 개설할 때는 흥륜사를 옛 자리에 복원한다는 원을 분명히 세웠을 겁니다. 그런데 그 자리가 신라 때의 흥륜사 자리가 아니라는 주장이 지금 힘을 받고 있는 실정입니다. 여개서 이런 문제를 나름대로 심도 있게 다뤄 볼까 합니다.

 

흥륜사는 워낙 뜻 깊고 친근한 이름이 돼나서 전국 여러 곳에 같은 이름의 사찰이 있습니다. 인천에도 있고 순천에도 있습니다.

 

본 주제와는 약간 거리가 있는데 지금 흥륜사 선원장으로 계시는 혜해스님은 금강산 신계사에서 수행하신 스님이십니다.

 

혜해 스님은 금강산 신계사 법기암으로 출가하셨으며 지금 살아 계시는 스님들 중에 금강산으로 출가하신 몇 분 안되는 스님 중의 한 분입니다. 법기 문중의 최고 어른이신 거죠.

금강산 관광이 개시된 후 금강산 법기암 터를 찾아 60년 전을 회상하시면서 황성옛터를 불렀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습니다.

 

혜해 스님은 스물네 살의 꽃다운 나이에 금강산 법기암 임대원 스님을 은사로 출가 합니다. 임대원 스님은 판사의 법복도 팽개치고 엿장수로 떠돌다 금강산에서 스님이 되신 효봉 스님을 시봉하신 것으로 유명합니다. 효봉 스님이 법기암 무문토굴에서 용맹정진 할 때 하루 한 끼씩 공양을 바치면서 시봉을 드셨습니다. 그 때의 인연으로 금강산 신계사가 복원되었을 때 혜해 스님이 법기암 터를 찾아내셨습니다.

 

저도 법기암 터에 가 봤습니다. 6.25 때 폭격으로 폐허가 되어 있었지만 축대와 효봉스님이 크게 깨달으셨던 무문토굴 터는 그대로 남아 있었습니다. 형국이 협소한 걸로 봐서 별도의 금당을 두지 않고 스님들이 인법당에서 수행하신 것 같았습니다. 들어가는 입구에는 20여명의 스님들이 식수로 썼던 자그만 옹달샘이 퐁퐁 물을 솟구쳐내고 있었습니다. 소수의 사람들이 수행하기에 적합한 장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시 흥륜사 절터로 돌아와서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흥륜사 터에 혼란이 있는데 이 문제는 일제 시대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일제는 1910년에 경주에 있는 신라시대 사찰 터를 일제히 조사합니다. 이때 지금의 흥륜사 자리를 신라 최초의 사찰 흥륜사가 있었던 곳으로 비정 고시합니다. 모두 그렇게 믿은 거지요, 그런데 19762월 경주에 있는 신라문화동인회가 이곳을 답사해서 글자가 새겨진 기와를 발견합니다. 그 기와에는 靈妙之寺란 글씨가 씌어있었습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지금의 흥륜사 자리는 영묘사 자리라는 주장이 나오기 시작한 겁니다. 그 뒤에 이곳에서는 大令妙寺造瓦라는 기와와, ‘靈廟’, ‘靈妙’, ‘令妙라고 새겨진 기와와 벽돌이 계속해서 발견됩니다. 그래서 이곳은 영묘사 자리라는 주장이 더욱 더 신뢰를 받게 된 것입니다.

일제가 신라시대 절터를 조사할 때 흥륜사를 지금의 흥륜사 자리에 비정한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는데 일제는 당시로서는 최대한으로 고증을 했다고 보여집니다. 하지만 여러 기록들이 명확하지 않은데다 현재 흥륜사가 있는 곳을 흥륜들이라고 부르고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비정한 것 같습니다.

 

또 벽돌이나 기와 같은 것은 무겁지 않은 것이기 때문에 아이들이 장난삼아서, 혹은 농사에 방해된다고, 쓰레기처럼 한 곳에 갖다 버릴 수도 있습니다.

또 하나는 대영묘사조와란 글은 대영묘사에서 만든 기와란 뜻입니다. 이 말로 미뤄 보면 대영묘사에서 만든 기와로 기와를 다시 이었다라고도 해석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점이 현재의 위치에 대해서 부정적으로만 볼 수도 없다는 단서가 됩니다. 그래서 저는 기와 출토로 그 위치를 단정 짓는 것은 무리가 있을 수도 있다고 봅니다.

 

그리고 또 하나 의문은 영묘라는 글자입니다. 영묘라는 글자가 한결같지 못하고 신령 영자를 쓰기도 하고 영 령자를 쓰기도 하고 사당 묘묘할 묘자를 혼용해서 쓰기도 하는데 그 이유를 알아볼까요?

 

신라시대나 고려시대에는 우리말을 적는 우리글이 없었습니다. 한자를 빌려서 쓰다 보니까 한자의 뜻과는 상관없이 발음만 취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람 이름이나 지명을 표기할 때 그런 현상이 두드러지지요. 예를 들면 기차를 타고 부산 갈 때 낙동강 가의 물금이란 곳을 지나게 됩니다.

이 물금이 지금은 말 물자에 금할 금자를 씁니다. 한자의 뜻으로 새기자면 금하지 않는다는 뜻이 되겠는데 실상은 그렇지 않다는 겁니다. 은 한자의 말 물이 아니라 우리말의 라는 거고 은 금할 금자로 썼지만 우리말의 입니다. 물금은 신라 초기부터 철광산이 개발되어서 신라와 가야의 분쟁지역이 된 곳입니다. 물금은 물가에서 쇠를 캐내는 곳이란 우리말을 한자로 적은 것에 불과한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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