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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연(一然)은 화두(話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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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연(一然)은 화두(話頭)다

일연은 화두다

잠궈진 역사의 비밀창고, 일연스님이 열쇠다

<삼국유사>가 일연스님의 저술이라고 밝혀졌을 때, 세상 사람들은 단순히 역사에 조예가 있는 승려쯤으로 생각했다. 그 후에 ‘단군신화가 언급되었다’는 그의 저술의 중요성이 부각되면서 <삼국유사>를 ‘민족역사의 시원’쯤으로 생각했을 뿐이다. 그리고 일본 경도대학에서 일연스님의 저술인 ,<중편조동오위>복각본이 일연스님의 또 다른 호인 회연으로 발견되었을 때, 사람들은 선사로서의 일연스님에 주목했다. 이제, 일연스님의 12년 남해시절에서 남해분사와 팔만대장경의 인연이 밝혀지면 일연스님은 우리 민족의 성보, 세계의 문화유산인 고려대장경 불사의 주역이 될 것이다.

견명,회연,일연
일연비문에 ‘국존의 휘(諱)가 견명이고, 자는 회연인데, 후에 일연으로 역명’했다고 나와 있다. 일연스님은 많은 호(이름)을 갖고 있었지만, 대표적인 것으로 견명, 회연, 일연을 사용했다. 이 이름자를 사용한 것이 그의 생애를 단적으로 표현해주고 있다. 일연스님은 정안의 죽음 뒤에 펴낸 <중편조동오위>에 회연이라고 적고 있는데, 이는 암울한 역사의 한 단면, 권력에의 혐오감을 드러내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일연이라는 이름은 왕정복고 후에 쓰게 되는데, 이는 자신의 과거를 반추해보면서 밝음(명)과 그림자(회)가 ‘둘이 아니라 하나’라고 하는 불교적 통찰력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12년 남해시절
선승으로서의 일연스님의 생애는 몽고군의 고려침공과 더불어 시작과 끝을 같이하고 있다. 전란의 시대, 가까스로 도망쳐서 생명을 부지한 백성들에게 올바른 경작지를 잃고 살아남을 길이란, 군사상의 전략적 요지에서 멀리 벗어난 산간벽지로 숨어 들어, 화전민이 되는 길밖에 없었다. 일연이 왕실에서 주는 호사를 마다하고, 평생의 도량으로 삼은 곳이란 바로 그러한 화전민의 세계였다. 일연스님은 1232년 몽고군의 2차 침입으로 팔공산 부인사의 초조대장경이 전화에 소실되었다는 비보를 주석하고 있는 황량한 포산(비슬산)에서 들었으리라 짐작한다.

정안은 왜 일연스님을 자신의 원찰인 정림사로 오시게끔 정한 것일까. 왜 일연스님은 23년간 칩거했던 포산을 떠나 먼 길을 나서게 되었을까. 일연비문에 이르기를, 일연스님이 남해도로 건너간 것은 일연이 마흔넷인 1249년, 정안이 그의 사제를 희사해서 정림사로 꾸미고, 일연을 맞아들여 개당했다는 것이므로, 8년 뒤 같은 섬 안의 길상암으로 한적을 구하여 이주한 기간을 합칠 때, 스님은 앞뒤 12년간을 남해도에 머무르게 된다. <중편조동오위> 서문에서 <병진년 여름에 윤산 길상암에 기석하면서 여한을 얻어 오랜 숙원이던 이 책의 개편에 착수, 드디어 그것을 두 권으로 엮어서 상재한다>는 이 해가 중통 원년(1260)임을 밝히고 있다. 윤산 길상암의 윤산은 남해현의 별칭이다. 다음해 중통 2년에 일연은 강화정부의 소명을 받고 강도 선월사로 진산한다. 1256년에서 1261년까지, 나이로 쳐서 쉰하나로부터 쉰여섯까지 다시 6년 동안 남해도에 머물러 있었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1249년 11월에 오랜 시름 끝에 최이가 죽는다. 이 해는 일연스님이 남해 정림사로 진산한 해다. 최이의 죽음에 임박하여 정안이 상경할 필요가 있었다면 스님의 정림사 진산은 정안의 남해도에서의 직무를 대행한다는 의미를 지닌다. 또 혹 1243년에서 1245년까지 각판의 작업량이 급상승해 있음을 감안할 때, 그것을 서두를 필요가 있어서 그러한 것이었다면, 완성된 경판을 하루빨리 강화도로 해상운송해야 하는 막중한 업무가 뒤따르고, 그것 역시 정안이 책임지고 나선 것이 아니었던가 생각할 수 있다. 최 이의 권좌는 그의 아들 항(沆, 萬全이 改名)에게 계승된다.

1251년 정월, 정안이 지문하성사(知門下省事, 종二품직)로 제수된다. 그리고 같은 해 9월, 고종왕이 서문(西門)밖 대장경 판당(大藏經板堂)에 나아가 백관과 더불어 공(功)이 필(畢)했음을 고하고 행향(行香)의 의식을 치룬다. 나는 여기서 생각하거니와, 서문밖에 대장경 판당을 서둘러 성주한 사실하며 행향의 의식이 모두 정안 한 사람의 주관으로 진행된 것이 아니었던가. 강화정부를 통틀어 처음부터 이 일에 관여해 온 이는 정안 한 사람 밖에 살아있는 이가 없기 때문이다. 정안의 인망은 더욱 높아 밖에 없다. 참지정사(參知政事)로 승진한다. 1256년, 일연스님이 황급하게 정림사를 작별하고 거기서 그리 멀지 않은 윤산 길상암(輪山 吉祥庵)으로 자리를 옮긴다. <고려사>는 정안이 죽은 해를 기록하지 않았다. 다만 최 항이 차차로 그 본색을 드러내어 정안을 시기한 나머지 죄목을 꾸며 백령도로 귀양보낸 다음 거기서 침살(沈殺)코 만다. 아울러 그 재산을 몰수한다. 정림사도 몰수된 재산속에 든 것이었다면, 정안이 죽은 해와 일연스님이 정림사를 뜨게 된 이유가 더욱 분명해 진다.

1268년 여름, 왕명으로 운해사(雲海寺)에서 100인의 고승이 모여 대장낙성회(大藏落成會)를 개최하고 일연이 그 주맹자(主盟者)로 추대되어 100일 동안 계속된다. 운해사의 위치는 아직 알 길이 없다.

대장경의 인연
일연스님의 대장경과의 인연은 길고도 길다. 그가 선열의 여가에 두루 열람한 대장경, 소실의 안타까움을 접한 초조대장경, 판각을 마치고 그가 증의(證義)한 대장경, 그리고 운해사에서 대장낙성회의 주맹을 맡으면서 가진 회억들 마저도 그는 대장경과 깊이 인연 지워져 있다.

의문이 깊어진다. <고려사>에 있는 제도감각색조(제도감각색조)에는 왜 대장도감만 빠져있는 것일까? 이렇기 때문에 대장경판각사업을 맡은 이들의 소임이 분명치 못해서 ‘증의’ 또는 ‘교정’을 한 사람이 있다는 개연성을 만족시키지 못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교정별록>을 만든 개태사 승통 수기스님이 대장경불사의 주역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는 교감을 책임지고 있었으며, 증의와는 그 소임이 엄연히 다르다. 교종과 선종은 서로 대립하므로, 선종승려의 대장경 참여를 의심의 눈으로 봐왔던 것도 벌써 우스운 일이 되었다. 또 분사도감은 관청의 기능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지방행정관이 담당했으리라는 주장도 이 의문에 대한 충분한 설명이 되지 못한다.

대장경 판각기간과 분사도감을 포함한 대장도감의 존립기간을 동일하게 보는 것은 큰 오류를 낳을 수 있지 않을까? 많은 부분이 수정되기는 했지만, <고려사>에 기술된 낙성식 연도에서 밝혀진 1236년부터 16년간은 대장경 판각을 위한 준비기간을 배제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해인사에 봉안되어 있는 팔만대장경판 중에서도 정판과 보유판과의 관계도 밝혀져야 한다. 또한, 분사도감의 위치에 대해서도 분명한 주장이 제기되어야 하지 않을까. 한 서지학자는 ‘남해분사도감’에서만 판각되었다고 주장하지만, 이것 또한 대장경이운에 관한 기록과 강화도에서 결질된 용장사의 대장경을 다시 인출해 갔다는 등의 기록을 채택하지 않은 듯 하다.

인멸된 주석처
일연스님이 주석하신 절은 왜 모두 인멸되고 없는가? 그리고 굳이 군위의 인각사를 하산소로 정한 이유는 무엇일까? 9살 때 고향을 떠나 향했던 해양 무량사는 찾을 길이 없고, 출가한 진전사는 빈터만 남아있을 뿐이다. 포산은 스님의 이야기만 무성하고, <역대연표>를 쓰기 시작하고, 사액이 내려졌던 인흥사는 한 문중의 세거지가 되어 있고, 운문사와 포항의 오어사는 옛사람의 흔적을 도저히 찾아볼 수 없고, 일연스님의 비문과 정조탑이 있는 인각사조차도 1미터 이상의 높이로 매립되어 있었다는 사실이 발굴조사에서 나타났기 때문이다. <대장낙성식>이 열렸다는 운해사도 그 흔적을 찾기 어렵다. 운부암과 은해사의 중간쯤인 해안평에 있었으리라 짐작할 뿐이다. 국사를 지냈음에도 <고려사>에 한 줄 이름을 내밀지 못하는 일연스님. 조선시대에 들면서 일연스님은 그 어떤 일로 철저히 환영받지 못하게 되었던 것일까.

일연스님을 에워싼 이 수많은 의문부호들은 700년 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망각의 무게에 짓눌려 온 것일까. 우리는 이 시점에서 서로간의 전공분야를 회통시켜 정림사와 남해분사, 그리고 일연스님과 대장경 조성의 비밀을 새롭게 밝혀내야 한다. 일연스님연구, 고려후기불교사연구, 선종사연구, 최씨무인정권연구, 삼별초연구, 대장경연구, 고지리연구, 고인쇄연구, 사지발굴연구, 서지학, 금석문연구, 경전유통교류사. 약 12개 분야의 전문가가 한자리에 모여서 가슴을 열면, 감춰진 역사의 문도 열린다.

일연스님의 생애에서 증명코자 한 오직 한 가지 진실이란, 피모대각 이류중행(被毛戴角 異類中行)에 있었다. 하지만 일연스님을 향한 의심덩어리는 확철대오로 다가오지 않는다. 답답하고 미안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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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被毛戴角 異類中行 : 털 옷을 입고 뿔을 머리에 이고 다른 무리 속에 행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