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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의 퇴로(退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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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의 퇴로(退路)
문화의 퇴로(退路)

‘넘치는 것은 모자람만 못하다’는 말은 ‘중용’이라는 의미와 함께 우리에게 언제나 균형감을 갖게 하는 경구다. 그렇지만, 많은 사람들이 균형감을 잃어버릴 만큼 문화라는 이름의 거대한 구조물이 우리를 누르고 있다.

지킬 것은 지키고, 버릴 것은 버려야 하듯이 문화의 세계도 유행이라는 이름으로 알 수 있듯 질량불변의 법칙처럼 우리를 둘러싸고 있다고 봐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명석한 문화소비자는 벌써 알아차렸으리라. 재탕문화, 삼탕문화는 다반사이고, 괜히 오버하는 문화, 뻔한 문화, 너무나 생경한 문화, 돈으로만 만들어지는 문화, 표절과 왜곡으로 끓어 넘치는 문화의 긴 터널 속을 우리들이 어렵사리 지나고 있다는 것을. 시간이 가면 갈수록 심화되는 깊은 맛의 문화가 아니라, 가지수만 많아지고, 유통기한만 연장되는 인스턴트 찬거리문화가 넘치고 있다는 것을. 이 글 속에서는 이미 예감했던 비유와 은유가 드러나 보인다 해도 할 수 없는 일이지만, 이름하여 문화범람의 시대를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

무엇이든 종류와 수가 많아지면 사람들은 얼핏 풍요로움으로 착각하지만, 그것은 사실 넘칠 ‘범’, 넘칠 ‘람’자를 쓰는 범람(氾濫)이며, 범람의 큰 피해는 물난리를 겪을 때, 역류되면서 일어난다. 뿐만 아니라, 문화의 범람은 서로의 이기심으로 인하여, 혹은 자문화중심주의에 휘둘려 오히려 문화의 폭력성으로 드러난다. 제한된 숫자의 문화소비자들에게 끈질긴 강요를 하며 다가와, 다른 문화들까지 식상하고 혐오스럽게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동시대인들은 그 다양성은 충분히 인정하되, 흐르는 물처럼 상투성을 벗어나야 한다는 바람을 가지게 된다.

여기에다 봇물처럼 터진 다문화(多文化)현상까지 겹쳐지면, 매우 당혹스러워진다. 다문화라는 용어는 엄격하게 말해서 멀티컬쳐니, 크로스컬쳐를 무책임하게 우리식으로 표현한 용어에 지나지 않는다. 본래 의미인 복합문화라는 뜻은 어떤 뉘앙스도 찾을 길이 없다. 이민사회의 대표적인 문화현상인 용광로문화, 신선로문화를 지극히 평면적으로 표현한 말이 지나지 않는다. 다수자들로 하여금 소수자들의 문화도 배우게 하자는 성찰도 일어나고, 존재의 다름과 같음을 이해하면서 다른 존재자들과도 함께 잘 어울려 살 수 있는 문화를 창조해야 하는 것이다.

한 문화전문가는 문화의 공존공영을 위해서 문화의 단계를 들어가기-소통하기-뛰어넘기-세우기로 분류했다. 이것이 문화를 이해하고, 교감하고, 수용하여 창조하는 과정이라고 볼 때, 종교의 귀한 가르침을 알고 실천하는 신-해-행-증(信解行證)의 단계와 별반 다르지 않다. 문화는 어설픈 엄숙주의만 빠진다면 종교처럼 우리에게 작용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천만 범람하는 것이 아니다. 범람의 원인을 고장난 하수펌프에만 물어서는 안된다. 총체적인 치수(治水)의 문제가 물려있다. 문화의 범람도 그 원인의 뿌리는 깊을 것이다. 반짝인다고 다 ‘금’이 아니듯, 이름만 달고 있다고 모든 문화에 계관이 씌여져서는 안될 것이다. 먼저, 박약한 문화변별력을 가지고 머무르거나, 물러갈 문화를 가려내지 못하는 것도 문제지만, 그 식별안을 키우지 못한 것은 사회전체의 책임이다. 어쩌면 오랫동안 누려온 사람들의 고정관념 속에 고여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살아남아야 할 문화와 살려내야 할 문화를 구분하지 못하고, 동시대를 호흡하지 못하는 문화는 그야말로 문화답지 못하다.

문화답지 못한 문화에게 퇴로를 열어주자. 앞으로 연이어 이 땅을 덮쳐올 다양한 문화를 생각하면, 분명히 문화를 위한 퇴로가 열려야 한다. 죽지 않고 다만 사라질 뿐이지만, 당당하게 사라질 수 있도록, 그리하여 다시 태어날 수 있도록, 범람이 풍요로 되돌아 올 수 있도록 멋진 퇴로를 열어주자. 그리고 스스럼없이 퇴로를 빠져나가는 문화에게 박수를!

역설적으로 나일강의 범람은 이집트사람들에게는 기원의 대상이었다. 이집트의 농부들은 나일강의 범람 때문에 살아간다. 그들에게는 범람이 곧 풍요를 의미한다. 문명을 탄생시킨 지역이 믿고 따랐던 철리(哲理)가 아닐까. 문화의 범람으로 열려진 퇴로가 다시 신세계의 출구가 되기까지는 얼마간의 시간이 흘러야 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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