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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만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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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기픈 2010-06-08 12:36:50

시방삼세 부처님과 거룩하신 불보살님들께 지극한 마음으로 예배공양하오며
사부대중과 이하 모든분들에게 간절한 마음으로 이글 공양합니다
(설보화작가의 첫수필집 중에서_)
 

동안거 결제 들어간 지가 벌써 달력 한 장이 무심히 넘어가던 이른 아침.
차가운 겨울바람이 앙상한 빈가지에 걸려서 제 갈길 가지 못한 서리를 혹독하게 내리치고 있다.
늙은 노모의 손가락 같은 감나무가 생각나는가 싶었는데, 이 겨울 토굴에서 정진하고 계실 스님의 감나무 닮은 손이 그리워진다. 몇몇 지인들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들은 흔쾌히 가기로 결정한다.


스님의 토굴은 이름이 없다.
가는 길은 예전에 한 번 들은 적이 있었지만 정확하지 않기에 아마도 찾는데 시간이 걸릴 것 같다.
헤맬 것 같은 기분을 안고 이른 아침 출발을 서둘렀다.
창문에 고요히 앉은 햇살 덕에 히트를 틀지 않아도 될 만큼 따사로운 날씨였다.
전라도 길은 처음이라 전날 인터넷에서 찾아놓은 지도가 우리들의 귀한 안내자가 되었고 우린 그 안내자 덕분에 가는 길이 힘들지는 않았다. 고속도로를 벗어나 국도에 접어드는데 때 아닌 눈이 길 가장자리에 하얀 길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대구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눈이라 우리는 약속이나 한 듯이 탄성을 질렀다. 한적한 시골길로 접어들었다.
좌우로 텅 빈 논에 누런 짚단이 하얀 눈을 밀짚모자 삼아 쓰고 있는 것을 본 우리는 또 한 번 탄성! 마을 입구에 들어섰다.
길이 두 갈래다. 전방인 것 같은 구멍가게 주인에게 스님의 인상착의를 얘기했더니 다행히 길안내를 해주신다.
대구를 벗어날 때 우린 헤맬 것을 예상했는지라 못 찾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반 그냥 나선 걸음 반이었는데 의외로 길 찾기가 수월했다.
그런데 웬 난관! 길이 없다. 승용차로 갈 수 있는 길이 아니었다.
경운기만 다니는 좁은 길이었으며 울퉁불퉁 구불구불 최대의 난적을 만난 것이다.
한숨이 나온다. 예상치 못한 길이었고 미처 예전에 스님께 물음 하지 않았던 내 무관심에 한숨이 한 번 더.
걸어서 1시간은 넘게 걸리는 길이라고 조심해서 눈길 걸어가라는 전방아저씨의 걸어서라는 말을 강조한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다. 차에서 내리니 마을과는 다르다.
요즘은 차를 타고 곧장 내리면 절이다.
난 토굴 또한 그러리라고 생각하고 옷을 가볍게 입었을 뿐만 아니라 장갑 따위는 아예 생각도 못했는데 난감하다.
‘미리 좀 알고 왔으면 이런 고생은···’
지인들의 투덜거림이 등 뒤로 들린다. 미안하다 말하기엔 너무 염치없어서 그냥 못들은 척하며 빠른 걸음으로 걸었다.
오르막길이 계속 이어지고 미안한 맘 때문에 저만치 앞서서 걸어 올라가며 나 혼자 콧노래 흥얼거렸다.
그런데 뒤에서 “우와 이번 여름장마가 사납긴 사나웠어. 저 큰 소나무가 무너진 것 봐 저 상수리나무는 어떻고 쯧쯧,” 하며 투덜거림은 나무걱정에 묻어버린 듯하다.
다들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추위도 잊고 산속 겨울 풍경도 그럭저럭 볼만하다며 어머니 합창단 단원 한분의 노래에 맞춰 코러스가 되어 흥얼거린다.
투두둑 거리는 가지소리에 고개들어보니 까만 눈 번들거리며 날 쳐다보는 청설모, 그놈은 조용한 겨울 산속의 병정이라도 된 듯 빈 나무 꼭대기를 지키고 있었다.

고놈에게서 눈을 떼자마자 내 눈에 오래되어 퇴색한 기와지붕이 고개 내밀고 우리 일행을 맞이한다. 반쯤 쓰러지듯 기울어가는 대문이 안쓰럽다.
서서히 집의 몸체가 드러나고 어른이 앉으면 엉덩이 끼일만한 초등학교 나무의자에는 채 녹지 못한 눈과 사리빗자루가 누워서 ‘어서 와 고생 많았제?’ 스님대신 인사한다.
마당이래야 좁고 작아서 들어서니 곧바로 툇마루가 보인다.
먼지 뽀얗게 쌓인 툇마루에는 새 발자국조차 보이지 않고 댓돌위에 까만 고무신 속 공벌레만이 동그마니 앉아서 스님을 지키고 있는 듯하다. 방 한 칸에 공양간(부엌)한 칸이 전부인 듯하다. 바람 한 점 없이 고요한 토굴에 정적을 깨는 우리들의 소란스러운 소리에 방문이 덜컹!


-누고- 너무나 오랜만에 듣는 굵직한 스님의 목소리 반가움에 목이 메어

-저라예-

-우예 왔노?- 하시며 곧장 들어오라 하신다. 낮은 방문 들어서며 고개 숙이니

-니는 키가 작아 고개 안숙이도 된다.-

하시며 농을 하신다. 우리 일행들은 깔깔깔 넘어간다.


둥근 짚방석을 깔아놓은 2평 남짓한 방에 들어서니 냉기가 느껴진다. 불을 떼지 않았다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마음이 아파온다. 스님이 선반위에 올려놓은 찻상을 꺼내 손으로 먼지를 쓰윽 밀어내고 다관과 찻잔을 올려놓으신다.
아뿔사! 뜨거운 물이 없다. 공양간(부엌)문을 열고 아궁이 문을 열어보니 냉기가 스멀스멀 기어 나오고 솥은 오랫동안 비어있었는지 윤기가 없다. 찬장을 열어보니 간장도 거의 바닥을 드러내고 있고, 쌀 단지를 열어봤더니 미처 겨울잠 떠나지 못한 벌레만이 몇 안 되는 쌀알을 지키고 있다.
눈물이 날 것만 같다. 솔방울과 잔가지 굵은 가지 따위의 겨울 땔감만이 한 쪽 귀퉁이에 엿가락같이 엉켜있다.
나는 그날 불목하니가 되어 불을 뗐다. 어떻게 떼는지 몰라서 애를 먹고 있는데 함께 온 지인 두 분이 걱정되었는지 뒤따라 들어와 시골에서 늘 하던 짓이었다며 도와주었고 스님 사정을 눈치 챈 두 분들의 안색이 좋지 않다.
솥단지 위로 김이 모락모락 올라온다. 그것을 본 두 분이 좋아라! 하며 박수를 친다. 노란 양은 주전자에 물을 담아 찻상에 얹어놓으니 스님은 미소로써 수고를 대신 말씀하신다. 불을 떼고 나니 조금씩 방안으로 온기가 들어오는 것 같았고, 스님께선 차 통을 열고 다관에 차를 쏟아놓으시며 대접할게 없어서 어쩌나! 하시더니 며칠 전 우렁 각시인지, 우렁 신랑인지가 놓고 간 차밖에 없다며 차를 우려내셔서 한잔 씩 주신다.
고마운 분의 차 선물이여서 그런지 온 방안이 온기로 가득 찼으며, 진한 차향이 빈천한 방안을 만족으로 채운다. 스님은 대접할 게 없지만 저녁밥은 먹고 가야 한다며 기어이 공양 간으로 들어가신다. 아무도 못 들어오게 공양간문의 걸쇠를 닫아건다. 손수 밥을 하시는 동안 난 우리 일행에게 스님께 보시하면 큰 복을 얻는다고 했고, 스님의 살림이 궁한 것 같으니 십시일반 힘을 좀 모으자고 했다. 지인들은  기분 좋게 각자의 지갑을 틀어 작은 봉투를 만들었다. 공양간문이 열리고 밥상에 차려진 건 박주산채도 되지 않는 소금 넣어 만든 주먹밥이었다.
사는 게 이렇다며 대접이 궁해서 미안하다 하신다. 그 밥상에 가슴이 쓰리고, 미안하단 말씀에 가슴이 울컥, 헤어진 소매와 수 십군 데 쪽모이 세공한 분소의(승복) 바지를 보니 눈물이 날것만 같다. 선방엘 가지 않아서 해제 비가 없다 보니 살림이 궁하고, 어떤 스님의 토굴인데 잠시 그 스님 오실 때까지 쓰는 거라며 이것만도 감사하다 하신다.
기분 좋은 공양을 끝낸 우리는 밥상 옆에 슬쩍 돈 봉투를 밀어 넣었다. 대접에 감사했고 빈손으로 와서 죄송하다하고서 일어서려는데 스님께서 임제 선사의 일화를 들려주신다. 일어섰다가 다시 앉고 만다.


중국 불교에서 선종(禪宗)이 천하를 풍미할 때 다섯 종파가 있었는데 그 가운데 임제종이 가장 융성했다고 하시며, 어떤 대부호가 임제종의 종주인 임제 선사의 법을 듣고 싶어서 거들먹거리며 찾아왔다고 한다.
시자는 활을 쏘고 계시는 스님을 모셔왔고, 스님은 그 부호 앞에 차 한 잔을 내놓았다. 그 부호는 자기의 시동(侍童)을 시켜서 황금 만 냥을 갖고 오라고 했으며 스님 앞에 황금이 든 나무 상자를 턱하니 놓고 번쩍이는 황금을 열어 보이면서


-스님, 제가 황금 만 냥을 드리러 왔습니다.

-응 그래, 놓고 가거라.

-아니 스님, 황금 만 냥입니다.

-그래, 놓고 가거라.

그 부호는 다시 자세를 고쳐 앉으면서

-이 황금 만 냥을 보시고도 진정 저에게 해주실 이야기가 없으십니까?

라고 묻는다. 임제 선사는 허허 웃으시며

-너는 이 황금 만 냥을 내놓고 칭찬 받으려 하느냐, 감사의 말을 들으려 하느냐, 너는 내게서 공명심이라는 도를 갖고 가려 하는구나. 무주상보시여야 하느니, 무주상보시란 그저 고맙고 감사하는 마음이며 그 마음이라야 큰 도를 깨우침이니라. 이 물건을 썩 가져가거라. 라고 하셨다고 한다.

그리고 시자를 불러 절 앞에

『고마움으로 감사함으로 주지 않는 어떠한 공양물도 받지 말아라.』

라는 현판을 세우게 했으며 사부대중이 왕래하는 도중 “꼭 이 글을 암송하여라.”라고 하셨다는 이야기였다.
그러면서 우리의 게면 쩍은 봉투를 도로 돌려주신다.
이 일화를 얘기하시는 스님을 보면서 나는 손이 부끄러워졌다. 낮은 방문을 열고 나오면서 스님 고무신 안에 봉투를 슬쩍 구겨 넣고 도망치듯 나왔다. 날씨도 춥고 내 마음도 날씨만큼이나 춥다.
한참을 내리막길을 뛰다시피 걸었다. 차가 저만치 앞에 보이는데 뒤에서 보살, 보살 한다. 스님께서 눈길을 헤치며 뛰어오신다. 큰일 났다. 들켰구나! 싶은 순간


-난 임제 선사가 아닙니다. 날 임제 선사로 만들지 마십시오. 그냥 산승일 뿐입니다. 그리고 부끄럽게 만들지 마십시오.

하시며 봉투를 다시 내 손에 들려주고 오던 길을 올라가셨다. 스님의 뒷모습보며 황금 만 냥도 아니고 코딱지만 한 돈인데··· 그 부호도 이런 부끄러운 마음을 갖고 내려왔을까!

돌아오는 길 차안에서 눈물 훔치며 울적해있는데, 지리산 휴게소가 보인다. 마침 지인들은 커피 한 잔 나누며 기분도 추위도 함께 녹이자고 한다. 뜨거운 커피를 한 모금 넘기는데 지인들이 기름 값 하라며 익살스럽게 봉투를 내민다.
그리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주는 거라며 받으라 한다.」그들의 그 익살스런 표정에 우리는 모두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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